[신충우 파일 247]
2011년 9월 1일 발행/ 도서출판 한림원/ 548쪽/ 정가 15,000원
ISBN 978-89-93512-27-4
자연경신충우(申忠雨)
1952년 충북 청원(쌀안) 출생으로
자연사상가, 과학저술가, 여행작가로 활동
◇ 주요 저서
존재냐, 가치냐『인간이란 무엇인가』(2007년 한림원)
생존인가, 번식인가『내 마음의 비밀』(2008년 한림원)
<서문>
세상의 끝에 서서
자연을 해방하라!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우리 인류가 지구에서 퇴출되지 않고 존속하려면 자연을 해방시켜야 한다. 최근들어 기상이변 등 인간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 날로 강화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압박과 구속이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지구촌을 불가마로 달구는 온난화와 사막화가 대표적인 예다.
자연은 인간의 노예도, 소유물도 아니다.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인간의 압박과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인간의 들러리로 전락시킨 환경이라는 용어로부터의 해방이 그것이다. 자연 해방은 자연을 인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원래의 자리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자연의 동식물처럼 생태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기본적으로 이것이 선행되어야한다. 세상의 주인인 자연이 인간의 노예와 들러리로 전락, 오늘날과 같은 생태위기가 초래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혁신적인 해방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땅’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두 번째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전자는 인간의 날고 싶은 심리를 기구에서 비행기, 우주선까지 발전시켰고 후자는 육체노동을 기계, 로봇으로 대체시켰다. 이런 성과는 현대의 과학물질 문명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 것이나 ‘자연의 역습’을 불려와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과 같은 우를 범하게 하는 것이다. 생태계의 일원에 불과한 인간이 오만하게 자연의 주인행세를 하다가 당하는 죗값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이 자연에게도 자연 스스로 존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생태복원차원에서 이 책이 발행되는 9월 1일을 ‘자연 해방의 날’로 지구촌에 선언한다.
‘인생 60’에 지구촌의 한 사람으로 자기반성을 겸해 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하는 21세기 현대문명 성찰서이다. 열 여섯 번째 저서로,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과거’를 일깨워 주는 ‘생태낙원’ 남태평양의 바누아트를 여행하면서 구도를 잡았다. 책 내용은 과학기자 출신의 생태연구가로서 이론보다는 보고 느낀 생태 현장에 초점을 두고 사례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 필자는 이 책을 내면서 지난 40년 동안 서울 도심에 살며 인간중심의 물질문명을 추구했던 ‘반자연적인 삶’에 대해 겸허하게 깊이 반성한다. 현대 문명인은 너나 없이 자연 앞에 죄인이다. ‘D-300’으로 상징되는 생물학적 요인에 의한 여섯 번째 대멸종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주범이 바로 우리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을 종횡으로 돌고 돌아, 내 고향 충청도 황샛말에서 서문을 쓴다. 과거에 황새가 서식하던 곳이다. 황새는 지구촌의 ‘대표적인 생태지표 생물’로 생태계의 상징적인 생명체이다. 황새는 순우리말로 ‘한+새’ 즉 ‘큰 새’라는 뜻이다. 키 110㎝, 양날개를 편 길이 2m로 우리 토종 텃새 가운데 가장 크다. 왜가릿과의 백로와 비슷하나 훨씬 더 크며 다리와 부리가 길다. 큰 부리를 부딪치며 독특한 짝짓기소리를 내며 대식가로 하루에 미꾸라지 500g정도를 먹는다. 천연기념물 제199호로 멸종위기 1급야생조류인 황새는 1970년대부터 개체수가 급감, 전세계에 3,000마리 정도 남아 있다.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에 멸종됐던 황새가 35년 만에 돌아왔다. 기적같은 일이다. 한국과 같이 1971년 황새를 잃었지만 시와 농민들의 노력으로 2005년 방사에 성공, 다시 황새를 볼 수 있게 됐다. 자연생태가 산업화 이전으로 복원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기적같은 일이다. 현대 문명에 의해 파생된 자연의 오염원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본의 황새서식지와 같이 사라진 동식물이 돌아와 살 수 있도록 지구촌의 자연생태를 복원시키자는 것이 필자가 이 책을 내는 동기이다.
위기에 처한 지구촌의 자연생태를 회복시키려면 그 주범인 인간이 변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생태의 일원으로 돌아가 야생의 동식물처럼 생태의 순환원리로 사는 것이다. 자연과 역행해온 현대문명이 생태중심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 시대에 현대 문명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생태인간’으로의 환골탈태이다. 사회생활시스템의 변화는 그 다음이다.
2011년 6월 19일, 허름한 복장에 밀짚 모자. 시골농부 같지만 불과 보름 여 전까지만 해도 법정을 지키던 이홍훈 전 대법관이다. 새벽 5시면 일어나 마당의 무성한 잡초도 뽑고 평소 읽고 싶었던 책도 보며 여유를 누리고 있다. 퇴임 후 고향(전북 고창)에서 살겠다는 그의 소신은 전관예우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세간의 유혹을 쉽게 뿌리쳤다. 신선한 충격이다. 아내의 든든한 후원도 그가 곧바로 낙향하는데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농사짓는 것을 선의 한 길“로 생각해온 그다. 텃밭을 일구며 흙의 가르침을 깨닫고 있다.
자연은 공존의 터전이다. 지구촌의 모든 것이 함께하는 시공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칭하는 우리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같이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인류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인류는 자연 없이 살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을 인간이 만든 소유물로 오만하게 인식하고 정복과 도전의 대상으로 생각, 함부로 파괴해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생물이 공생할 수 없게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공존한다고 하겠는가.
‘생명’의 푸른 행성 우리 지구가 온난화와 사막화 등에 따른 각종 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자기 조직체인 자연은 ‘존재의 사슬’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공생공존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지구도 그 구성체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자연의 일원인 인류가 오만하게 우리의 몸과 같은 자연을 파괴해 왔다. 자연이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 전락, 파괴되어온 것이다. 산업화․현대화․도시화라는 미명하에 인간에 의해 각종 악형이 저질러 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지구는 자연의 고문대(拷問臺)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자멸인가? 공존인가! 우리 인류는 자멸할까, 아니면 자연과 더불어 공존할까? 인류의 본향 자연(自然)의 생태를 통해 지구촌의 공존을 통찰해 보고자 한다. 자연만큼 아름다운 예술품은 없다. 필자는 이 책의 저술에 앞서 2007년 ‘죽음’을 통해 삶의 가치(「인간이란 무엇인가」)와 2008년 ‘마음’을 통해 인간의 존재(「내 마음의 비밀」)를 탐구 조명해 본 바 있다. 이들 세 권의 책은 삶의 ‘가치’- 인간의 ‘존재’- 지구촌의 ‘공존’을 연속으로 조명하는 사실상의 연작이다. 도서분류상으로는 생사학 → 진화심리학 → 생태학으로 이어지는 동선이다. 학문 간의 벽을 넘어 통섭(統攝)으로 보려 한다. 2006년부터 만 5년간에 걸친 대장정이자 자신과 싸운 ‘인고의 시간’이었다. 이 연작은 산 자와 죽은 자, 자연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상관관계를 사유하는 책이다. 인간에게 과연 자연이란 무엇인가?
현재 지구를 위기로 몰아가는 주범은 바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칭하는 우리 인간’이다. 자연은 우리와 연결돼 있는 생명의 유기체로 하나의 가족이다. 이에 ‘그린마일’을 걸어나가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이 책을 낸다. 그린 마일이란 사형수가 감방에서 나와 사형집행실까지 가는 길의 녹색 깔판이 깔려 있는 복도를 말한다.
- 원시인가, 야만인가?
- 행복인가, 물욕인가?
- 자연인가, 인간인가?
- 공존인가, 자멸인가?
- 1원론인가, 2원론인가?
- 자연인가, 사람인가?
- 인류에게 생태란 무엇인가?
- 녹색산업인가, 회색산업인가?
- 청색경제인가, 녹색경제인가?
- 생태시대인가, 녹색시대인가?
- 생태사회혁명인가, 생태산업혁명인가?
필자가 이 책에서 찾고자 고민하고, 사색하고 사유하는 주요 테마들이다. 자연 생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인간도 다른 존재들과 같이 생산 → 소비 → 분해 과정상의 소비자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이 책은 인간이 소유 정복해온 피해자, 대자연의 입장에서 생태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모색한다. 목차는 △자연의 섭리 △300년 후 △현대문명 성찰 △공존의 미학 등 4장으로 구성했다. 1~3장은 다시 10절로, 4장은 12절로 세분, 전체를 42절로 구성했다.
위기에 처한 지구촌을 살릴 구세주는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의 주인인 자연을 인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공존의 미학은 예술철학에서 말하는 생태미학과도 상통한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함께 있으면 아름다운 것이 공존의 미학이다. 공존은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가 파괴해온, 우리가 잃어 버린 ‘나’는 공존의 ‘나’가 아닌가 한다. 지구촌의 자연인을 통해 함께하는 공존의 나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공동체와 개인은 존재 가치가 상반될 수 있지만 공동의 선은 공존을 위해 서로 존중돼야 한다. 요즘은 특히 경제위기로 존재 가치를 높이고 개성을 추구하는 ‘자아의식’이 강하다.
현대의 과학물질 문명이 초래한 지구촌의 생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공존의 미학은 1원론의 자연경(自然經)이다. 이것이 세상을 구할 새로운 가치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경직된 ‘인식과 사고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분별하는 ‘인식’의 전환이,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사유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앞을 가리는 고정관념에서, 가식과 환상에서, 그리고 과욕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것을 지키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 연연하지 말아야 해결책이 나온다.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비움의 철학이 요구된다. 자기 조직계인 지구의 자정 능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구속으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지구의 생태를 파괴해 온 2원론의 종교, 지구의 생태를 파괴해 온 인본주의 사상, 지구의 생태를 파괴해 온 기존의 과학기술에서 벗어나는 환골탈태의 성찰이 요구된다.
자연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경서(經書)로 ‘자연경’이다. 자연경서란 인간이 만든 경서가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진 경서란 의미로 자연이 모두 경전이라는 말이다. 경서의 경(經)은 직물의 주축이 되는 날실을 가리키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연이 바로 경서라는 의미로 세상의 으뜸이라는 말이다. 생태계의 주인은 신도, 우주도, 외계인도, 지구인도 아닌 자연이다.
자연경은 자연을 인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연을 자연 그대로 우리의 몸과 같이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연은 서양의 종교처럼 소유의 대상도, 원시종교처럼 신앙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의 몸과 같이 생로병사를 함께하는 동무 개념의 동반자다. 우리 인류에겐 유전적으로 자연으로 향하는 본능이 있다. 자연에서의 수백만년 동안의 진화가 우리 유전자에 새겨 놓은 본능이 무의식 속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반한, 자연의 지배자라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자연의 일원으로 소박하게 생태주의로 자연과 같이 사는 것이 자연경의 실천이다.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을 벗고 생태계의 일원으로 자연처럼 살자는 말이다. 이것은 생태시대의 새로운 가치철학이자 생활철학이 되어야 한다.
21세기 지구촌의 이상향은 에코피아(Ecopia)로 우리말로는 생태낙원이다. 이의 노정을 도식적으면 보면 △생명의 자연→ △현생 인류→ △자연경제→ △2원론의 창조사상→ △인본주의→ △기계론적 자연관→ △산업혁명→ △적색경제→ △지구온난화→ △생태철학→ △환경주의→ △녹색경제(녹색기술)→ △생태주의→ △생태경제(생태기술)→ △생태사회혁명→ △생태공동체→ △에코피아가 그것이다.
이 시대의 화두, 생태(Eco)는 일반적으로 인위(人爲)가 배제된 자연의 순환구조를 말한다. 기존 사유(思惟)의 틀로는 더 이상 당면한 지구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 중심에서 생태 중심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는 생태철학이 그 배경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생태(生態)를 보면 생물간의 상호관계로, 유기체가 생존을 유지해 가는 데 직접․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자연조건을 말하나 생태철학이 출현한 배경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버리는 것 없이 끝없이 순환되는 무위의 자연조건’이 참다운 그 의미로 환경과 대비된다.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통해 해체돼 물질로서 다시 순환한다. 인간도 생태계의 일원으로 죽는다는 것은 사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태순환의 시작이다. 우리의 정신과 같은 유전정보가 담긴 DNA는 후손을 통해 이어지지만 그를 유지 보존해온 육신은 절명과 함께 다른 생물을 위한 자양분이 되어 우리의 곁에 회귀하는 것이므로 자연의 생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의 고향 황샛말은 필자가 유소년기를 함께한 산하로 50여년 전까지만해도 ‘지구촌 생태지표 생물’ 황새가 서식하던 곳이다. 현대인들이 지향해야 할 에코피아가 황샛말로 과거 선인들이 동경하던 동양의 ‘도원경’과 서양의 ‘유토피아’가 오늘날에는 이런 개념일 것이다. 자연생태가 복원되면 그 정도에 따라 자취를 감춘 마당가의 반딧불이, 도랑의 가재, 처마밑의 제비 등도 역순으로 황새도래 이전에 돌아올 것이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시작됐듯이 21세기 생태혁명은 1970년대 생태철학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보아야 한다. 산업혁명과 생태혁명은 결과론적으로 3세기를 사이를 서로 마주한다. 필자는 생태혁명의 태동을 산업혁명의 역작용으로 본다. 산업혁명이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지구온난화 등 자연의 역습을 불려와 그 대안으로 출현한 것이 생태혁명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연사상가로서 생태산업혁명보다는 생태사회혁명에 무게를 둔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생명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며 부수적으로 생태기술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 인류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생태산업혁명을 지향하다가 시행착오를 거쳐 종국에는 생태사회혁명으로 방향을 바꾸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구촌은 그 과정에서 비싼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개인주의 의 반대말로 종말을 고한 소련의 공산주의와 다른 것이다. 지금은 산업혁명에서 생태혁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생태산업혁명이 대세이다.
현재 지구촌에 일고 있는 생태 바람은 21세기 시대정신(에코패러다임)으로 자연으로의 복귀 운동이다. △현대 물질문명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 △현대 물질문명으로 인해 와해된 정신문화 △현대 물질문명으로 인해 생겨난 부작용을 개선·복구하자는 정신운동이다. 산업화․도시화․현대화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촌을 녹색으로 재건하자는 것이 이것으로 자연의 순환구조로 돌아가는 혁신적인 생태혁명을 불러올 것이다. 필자는 산업혁명의 연장인 생태산업혁명보다는 틀을 달리하는 새로운 정신혁명인 생태사회혁명을 지지한다.
현대 문명은 수많은 토착 부족을 전멸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해 왔다. 원시사회라고 해서 문화적으로 미개한 것이 아니며 원시부족의 사유 속에도 문명화된 세계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메커니즘이 있다. 현대 문명에 의해 무너진 대자연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성찰이 생태바람이다. 우리 인류는 ‘더 높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를 외치다 온난화에 봉착, 지구촌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 이룩해 온 인류의 물질문명도 공염불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고 ‘멸종’ 앞에, ‘자멸’ 앞에, ‘공멸’ 앞에 전 세계가 하나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생태바람이다.
그러나 아직 소리만 요란하다. 기업들이 경쟁을 하듯이 장삿속으로 접근, 가짜 녹색이 판을 치고 있다. 자연중심적인 생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고 인본의 환경적으로 접근하고 그것도 알맹이 없이 무늬만 녹색이다. 속된말로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다. 회색은 회색일 뿐이다. 지구촌의 생태계를 파괴해온 근원을 바꾸는 혁신이 수반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환경농업을 자연농업으로, 화석에너지를 자연에너지로, 산업기술을 생태기술로 바꾸는 등의 발상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인류가 향후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자멸한다면 우리가 이룩해 온 현재의 문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동안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워 왔다. 우리 한국인 고유의 천지인(天地人) 사상은 맑고 깨끗한 천연 그대로의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찾는 길이 바로 한민족으로서의 존재감 회복이라 생각한다. 생태바람은 자연 생태와 인간의 심신에 파고 든 황색을 녹색으로 바꾸는 정화 운동이다. 하나뿐인 지구의 생태를 복원하는 길은 우리 후손들을 위하는 것으로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나를 닮은 자식과 손자들은 생물학적으로 나의 유전자를 이어가는 바로 나다.
필자는 1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자연에서 이름을 모두 가져왔다. 장녀 ‘나래’는 뜻을 펴고 살라는 의미에서 날짐승의 날개 시어로, 차녀 ‘시내’는 맑고 깨끗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시냇물의 함축어로 이름을 지었다. 막내아들의 이름은 ‘범식’이다. 식(植)은 고령 신씨의 항렬로 아비의 우(雨)자 다음이다. 범은 호랑이를 상징한 것이다. 삭막한 도회지(서울)에 갇혀 사는 새끼들에게 고향을 그리는 ‘초록지기’로서 자연을 돌려주고 싶다.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 평생을 지배한다. 남한강 상류 천왕고원의 자연인으로 뿌리를 내리고 살 수 있게 초석을 놓아 준 13대 조부 동양재(신난, 문충공 보한재 신숙주 증손)께 감사를 드린다.
빠르고 편한 것만 지향하다 온누리가 생태위기에 빠진 오늘날, 우리가 성찰해 볼 것은 낮추고 비우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주인’인 자연이 오만한 ‘세입자’ 인간에게 주는 교훈이다. 신음․오열하는 지구촌 생태계 복원운동 차원에서 세계적인 자연애호가들과 함께 자연으로 ‘탐구여행’을 떠난다.
2011년 8월 15일
우주 은하 구상성단 태양계 지구 한반도 한남금북정맥 인경산자락 황샛말에서
저술가 자연경 신 충 우(申 忠 雨)
<목차>
[화보]
1. ‘깊고 먼 생명의 역사’ 스트로마톨라이트<호주 샤크만 >
2. 사라지는 죽마고우 ① 황새<교원대 한국황새복원센터>
3. 사라지는 죽마고우 ② 개똥벌레(반딧불이)<경기 남양주>
4. 사라지는 죽마고우 ③ 가재<전북 임실>
5. 사라지는 죽마고우 ④ 제비<경북 예천>
6. ‘자기 조직계’ 푸른 지구 <출처 : NASA>
[서문]
세상의 끝에 서서
제1장 자연의 섭리
1. 세계 자연유산
2. 창조의 빛
3. 생명의 물
4. 지구 최초의 광합성 생물
5. 자연의 수(數)
6. 자연의 생산자…식물
7. 자연의 소비자…동물
8. 자연의 분해자…미생물
9. 자연의 생명력
10. 동서양의 자연관
제2장 300년 후
1. 오만한 인류
2. 지구온난화
3. 지구사막화
4. 사라지는 죽마고우
5. 생태계 파괴
6. 생태계 교란
7. 환경호르몬
8. 학대와 유기
9. 서해의 간척 공학
10. 세상 끝과의 사유
제3장 현대문명 성찰
1. 자연의 역습
2. 인류 없는 세상
3. 생태발자국
4. 탄소배출권
5. 상반된 녹색과 성장
6. 현대문명 성찰의 생태시
7. 자연인가, 인간인가
8. 자연애호와 생태교육
9. 생태관광과 생태복원
10. 생태주권
제4장 공존의 미학
1. 고귀한 야만
2. 자연과의 공존
3. 공존의 미학
4. 자연경(自然經)
5. 자연의 마음
6. 느림과 여유
7. 자연밥상
8. 로컬푸드
9. 자연농업
10. 생태공동체
11. 자연에너지
12. 자연묘지
부록
Ⅰ. 생태용어 연보
Ⅱ. 기후변화 주요 일지
Ⅲ. 참고 및 인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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