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우 파일 232]
“wonderful! wonderful!”
토함산 일출을 보면서 외국인들이 신음처럼 하는 감탄의 소리다. 경주에 가게되면 새벽에 일어나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장관을 즐긴다. 볼 때 마다 새로운 맛을 느낀다. 해가 떠오르면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어 하나가 되는 장관을 연출한다. 석굴암부근에 보는 이 일출은 삼국시대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우리의 진화 이야기는 우리에게 생명의 신성함을 일깨워 준다. 세포와 생명체의 놀라운 복잡성의 신성함, 경이로운 다양함을 만드는 데 걸렸던 광대한 시간의 신성함,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일어난다는 게 있을 법하지 않은 엄청난 불가사의의 신성함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경의는 우리가 신성한 것을 인지할 때 일어나는 종교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계획에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다. 존재 전체와 작은 부분들 모두에게, 촉매 작용을 하고, 분비하고, 복제하고, 진화하는 무수한 작은 부분들에게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다.”
미국의 생물학자 어슐러 구디너프의저서『자연의 신성한 깊이』(1998년)에 나오는 내용이다.자연에는 불가사의한 경이로움이있다. 이 책의 저자는특정 종교 신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무신론자다.그녀는 종교적인 언어와 메타포를 사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을 ‘종교적 자연주의’라고 부른다.여기에는 종교학자 아버지의 영향이 미친 것 같다. 그녀의 아버지 어윈 구디너프는 20세기 중반에 활동한종교학자로 본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가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로 전향한 사람이다.불가지론은 인간은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종교적 인식론이다. 과학자가 된 어슐러는 무신론을 선택했지만 그녀의 생각과 언어에는 종교학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적 감수성이 다분히 스며있는 것 같다.
그런데 어슐러 구디너프는 비록 ‘신성함’, ‘불가사의’, ‘경의’, ‘종교적 감정’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를 특정한 신앙 대상과 관련짓지는 않는다. 다만 자연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파헤쳐 장대한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 보여 준 과학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지닌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더욱이 그녀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존재와 존속 자체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 자체가 중요할 뿐, 그 어떤 정당성 증명도, 창조자 같은 절대 존재도, 의미를 통합하는 상위 개념도 필요치 않다.” 무신론자로서의 진면모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결국 이 책의 저자는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띤 언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이 흔히 ‘종교적’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을 쓴 것이다.
꼭 그녀처럼 ‘종교적 자연주의’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을 마치 종교적 경험처럼 표현한 과학자들은 많다. 무신론, 불가지론, 범신론 등 그 입장이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유대계 미국 물리학자 아인슈타인(1879~1955년)은 자연의 경이와 신비 앞의 숙연한 감정에 ‘종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는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전통적인 유신론적 종교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가 자신이 말하는 신이란 굳이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신’이라고 했듯이, 그는 일종의 범신론적 무신론자였다.
또 ‘진화론의 아버지’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년)이『종의 기원』(1859년)에서 진화의 장대한 드라마를 마무리하면서 “이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라고 말한 것에도 어딘지 종교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다윈 역시 유신론적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고 대신 무신론적 경향이 강한 불가지론을 견지했다.
그런데 유신론은 물론 범신론이나 불가지론 따위와도 거리가 먼 좀 더 철저한 무신론자들 중에서조차 자연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감동을 거의 종교적인 분위기의 언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다음은 미국 천문학자 칼 세이건(1934~1996년)의『코스모스』(1980년) 첫머리이다.
“코스모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아주 희미하게라도 응시하노라면 그것은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떨리며, 높은 데서 떨어지는 아찔한 느낌이, 아득한 기억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위대한 신비들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무신론 과학자 중 한 사람이 한 말이다. 물론 종교적 의미로 읽힐 수도 있는 ‘신비’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이 인용문에서 종교적이라 할 만한 요소는 전혀 없다. 하지만 어딘지 미묘한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다. 세이건이 어떤 종교적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 아닌데도 말이다. 그의 말에서는 오래전부터 종교인들이 우주와 존재의 궁극적인 경계와 깊이 너머에 대한 감각을 표현해 온 말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긴다.
상기에 전술한 구디너프, 아인슈타인, 다윈,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신비 앞에서 표출하는 탄성 같은 고백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감이 간다.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 바닥을 알 수 없는 심해, 상상하기 힘든 우주의 광대한 거리와 아득한 어둠, 초신성으로 폭발한 지 이미 수억 년인데 이제야 비로소 내 망막에 도달했을 저 별빛들…, 이런 것들에서 느꼈던 가슴 벅찬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자연 앞에서 느끼는 감동을 종교적 언어로 표현하든, 과학적 언어로 표현하든, 아니면 자연의 깊은 신비에 압도돼 그저 침묵하든, 그 표현들에 담긴 감동의 깊이 자체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고 있는자연으로 나가 그 감동을 느껴보라.자연은 그냥 자연인데 각자의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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