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우파일 89]

IT벤처1호 비트컴 조현정

-신충우(u-Corea포럼 회장)


4년만의 만남이다. 지하 4층?지상 12층 규모의 사옥, 167명의 직원, 300억 원에 달하는 연매출…. 성공한 벤처사업가로서의 면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옥은 선릉역부근에서 강남요지인 강남역 부근의 서초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했더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답례했다. 사장직((주)월컴프레스/월간컴퓨터 발행인)에서 물러나 인생공부를 하다 IT전문기자로 복귀했다고 했더니 "맘 고생 많았다"며 고생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 듯 두 손을 내보였다. 그의 양 손등엔 크고 작은 흉터가 10여 개 있었다. 생활고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전파상에서 일할 때 얻은 상처란다.

"자녀가 몇이냐"고 물어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들이 어려울 때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했더니 "40여 개월이 된 아이가 있다"며 즐거워했다.

이렇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동안(童顔)의 이 사나이가 어떻게 냉엄한 비즈니스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 "남들이 공부만 하던 어린 시절 갖은 고생을 하며 밑바닥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이 이상 더 내려갈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비즈니스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조현정(45)을 만들어 낸 배수진이자 무기로 보여졌다.


필자가 4년전 2001년 11월 17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기사의 서두이다.

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하면 1호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국내 대학생 창업1호', '국내 PC용 소프트웨어 개발 1호', '테헤란밸리에 진출한 IT기업 1호', '병역특례회사 1호' 등이 그것.

그는 원조 벤처 1세대 CEO지만 아직도 골프를 들떠보지도 않는다. 이유는 직원들한테 열심히 일하라 해놓고, 사장혼자 운동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나름의 고집스런 생각때문이다.

물론 휴일에만 하면 문제없지만, 하다보면 평일에도 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고, 그런 개연성 자체를 아예 없애겠다는 심산이다. 조현정 사장의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다.

그는 베테랑 CEO답게 시장과 비즈니스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다. 완숙한 경영수완과 산업전체를 바라보는 폭넓은 시야는 단연 볻보인다.

비트컴퓨터는 1983년 당시 대학 3년생이던 조 사장이 창업, 설립 23년째를 맞고있는 1세대 벤처기업. 초창기 의료정보화의 사업모델을 아직도 고집하며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창업후 내리 17년간 흑자행진을 이어왔을 만큼 승승장구했고, 2004년에도 320억원대의 매출을 달성한 탄탄한 대표적 모범기업이다.


1971년초, 중학교 2년생인 15세의 조현정은 무작정 학업을 중단한 채 전파상 가전제품수리공으로 변신, 충무로에서 3년여간 일한다. 어린 조현정이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전파수리공으로 나선 것은 갑짝스레 찾아든 집안의 몰락 때문.

조현정은 김해시 한림면 부자집에서 태어났다. 대지만해도 2,000평이 넘는 큰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여섯살 때 부친이 작고하면서 집안은 급격히 몰락했고, 조현정의 운명역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온가족은 서울 이문동에 부엌도 없는 월세 단칸 쪽방으로 옮겼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조현정은 충무로에서 ‘업자수리 전문가’로 통했다. 즉 전파상에서 고치지 못하는 가전제품을 가져오면 고쳐주는 이른바 전파상을 대상으로 하는 종합수리센터였던 것. 하루에 TV를 13대씩 수리할 정도의 수리숙련공이 돼있었다.

조 사장은 지금도 두 손 내밀기를 쑥쓰러워한다. 두 손등에 굵직 굵직하게 불거져있는 흉터자국 때문이다. 무거운 가전제품을 옮기다가, 혹은 철제캐비넷의 칼날같은 모서리에 베여, 고사리 같은 두 손은 성한 날이 없었기 때문.

3년가까이 지난 1973년, 조현정은 TV, 오디오는 물론 냉장고, 에어컨 등 국산은 물론 고장난 외국제 고가 가전제품을 가장 잘 고치는 전문가로 충무로일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 때 조현정은 불과 17세, 학교를 다니면 고등학교 1년생 정도의 나이였다.

73년 늦은 봄, 조현정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이유는 화이트칼라가 되려면 졸업장은 있어야한다는 나름의 판단에서였다. 무려 3년가까이 전파수리공으로 일에 묻혀있었지만, 조현정은 총명한 소년이었다.

당시 조현정은 이미 영어 알파벳순서도 제대로 외우지 못할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은 상태였다. 하지만 어린 조현정은 남달랐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은 이때부터 발휘된다.

공부를 시작한 후 맞이한 7, 8월, 이문동의 단칸방은 한껏 달궈진 슬라브지붕탓에 그야말로 한증막 그 자체였다. 선풍기는 꿈도 못꾸던 시절이었다. 천정이 얼마나 더웠으면 그 한여름에 홑이불을 뒤집어쓰고 공부를 했을까?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한 지 83일만에 당당히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이듬해인 1974년 용문고에 입학한다. 유년시절의 조현정은 이미 목표한 것은 반드시 이뤄내는 강인한 소년이었다.

1977년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조현정은 1학년 2학기부터 캠퍼스내에 개인연구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중학교때 충무로에서 온갖 국산, 외제 가전제품을 수리하며 이미 전자제품전문가 수준에 올라있던 조현정에게 이론공부가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다짜고짜 교수를 찾아간 조현정은 강의는 들을 필요가 없으니,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수들은 반신반의하며 그의 실력을 테스트했다.

늘 시간이 틀리는 대형 시계탑과 고장난 방사능측정기를 고쳐보라고 주문한 것. 1970년대말 당시는 전기공급이 불안정해 아날로그시계는 당연히 시, 분 초침의 움직임이 들쭉날쭉할 수 밖에 없었다.

다 뜯어본 조현정은 결국 시계 속을 디지털방식으로 바꿨다. 시계탑 시각은 그 이후 정확하게 맞아 들어갔다. 방사능측정기 역시 3일만에 뚝딱 고쳐놓았다.

곱상하게 생긴 신입생의 현란한 솜씨에 인하대 교직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는 반응이었다. 그 사건이후 인하대는 조현정을 꼭 필요한 특급 기술자쯤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대학 1년생 조현정은 그 때부터 개인집무실을 두고, 한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450만원씩을 학교로부터 지급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학비면제에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고, 연구실까지 둔 조현정은 무늬만 대학생이지 실제는 교직원내지 조교 쯤되는 상황이었다. 대학 2학년때부터는 교수들과 공동프로젝트를 수없이 진행한다.

조현정은 2학년때부터 수업은 거의 듣지 않는다. 그의 대학동기생들이 조현정이란 학우를 잘 모르는 것도 이 때문. 1983년, 군복무후 3학년에 복학한 조현정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 학업도, 프로젝트도 별 흥미가 없었기 때문.

결국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조현정은 ‘창업’을 결심한다. 그는 당시 청계천소재 PC기술지원 회사에 하드웨어 만드는 기술을 지원해주고 있었던 터라, 막연하게나마 컴퓨터 관련쪽 사업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1983년, 8월, 창업에 나섰다. 남동생과 전화받는 여직원 딱 3명이 전부였다. 사무실은 뜻밖에도 청량리역앞 맘모스호텔내에 마련했다.

월 60만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하지만, 조현정의 수지타산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다. 하루 17시간씩 일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업아이템을 찾아내는 그의 동물적인 사업감각이었다. 정작 사업아이템을 PC용 SW로 정했지만, 그는 SW에 대해, 하드웨어를 구입하면 공짜로 끼워준다는 인식이 널리 펴져있는 점을 간파했다.

타겟 고객층은 인텔리이고 돈이 있는 층이라야하는 결론을 내린다. 나름의 논리근거를 집합, 업종을 뒤진후 내린 결론은 ‘의사’였다.

비트컴퓨터 최초의 사업아이템 보험청구프로그램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보험청구를 위해 매달 보름씩 매달리던 의사들로썬 한달에 2,3일정도 단말기에 데이터만 쳐넣으면 끝나는 보험청구프로그램은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병원당 150만원에 판매했다. 엄청난 고가였지만, 날개돋치듯 팔려나갔다. 지방에서는 왜 안파냐고 난리였다. 8월에 창업한 후 연말까지 올린 판매고는 무려 5,000만원. 대학생 CEO 조현정은 첫 작품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국내 최초로 개발한 보험청구프로그램은 비트컴퓨터가 창립후 회사로서 자리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효자’아이템이었다.

비트컴퓨터가 20년 넘게 의료정보화 전문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 역시 보험청구프로그램이 크게 작용했다. 10대의 나이에 전자제품 엔지니어로 탄탄한 현장경험을 갖춘 조현정은 여느 대학생과 다른 청년이었다.

그는 이미 20대에 창업, 흑자행진을 계속할만큼 경험과 나름의 비즈니스감각을 갖춘 될성부른 벤처기업가였다.


1989년초, 월스트리트저널이 1월 11일자로 한국의 컴퓨터산업을 주도하는 ‘한국의 떠오르는 별 3인’이란 기사타이틀로 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을 그 중 한명으로 대서특필한 기사를 보고, 당시 한승수 산자부장관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조현정 사장이 장관과의 면담때 제안한 게 바로, 우수연구인력 양성을 위한 병역특례제도. 산자부의 병역특례제도는 이렇게 탄생했다. 비트컴퓨터는 덕분에 병역특례기업 1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비트컴퓨터는 1984년부터 성장의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종합병원 의료정보화사업을 본격화하고, IBM과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비트컴퓨터의 비즈니스감각은 날로 발전한다.

1986년, IBM은 분야별 우수 SW개발회사를 대상으로 VAR(Value Added Remarketer)을 지정했다. 선정된 4개사중 비트컴퓨터를 제외한 3곳은 쌍용 등 모두 대기업. 고작 직원 16명에 불과한 비트컴퓨터가 선정된 것은 그만큼 기술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1987년, 국내 처음 내놓은 병원 원무관리프로그램 역시 불티나게 팔리며 2의 효자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88년 서울올림픽때 올림픽조직위에 납품한 성화봉송관리소프트웨어는 조 사장의 비즈니스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

올림픽조직위를 찾아간 조현정은 다짜고짜 성화봉송관리전산프로그램을 개발하겠다고 우겼다. 결국 비트는 매킨토시로 짠 3,000만원짜리 프로그램을 개발, 조직위에 무상 기증했다.

국내 최초 멀티미디어형 프로그램이었다. 비트컴퓨터의 승승장구는 곧바로 매출성장세로 이어졌다. 1989년 14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92년에는 22.5억원, 95년에는 43억원, 96년에는 무려 70억원으로 껑충뛰었다.

하지만 비트컴퓨터는 IMF한파가 몰아닥친 97년부터 더욱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간다. 탄탄하게 기반을 다져놓은 탓일까? 비트컴퓨터는 IMF가 터지자, 다른 회사와는 달리 매출이 가히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한다.

97년 107억원, 98년 114억원, 99년에는 163억원, 2000년에는 무려 238억원규모로 늘어나면서 비트컴퓨터는 SW전문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비트컴퓨터는 창업후 17년간 내리 흑자행진을 이어가는 엄청난 괴력을 과시하며 국내 대표 1세대 벤처기업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한다. 97년에는 600대 1이 넘는 엄청난 공모경쟁률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코스닥에 입성했다.


그는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로 ‘초심’을 꼽는다. 조 사장은 주위 친한 CEO들로부터 ‘바른생활’이란 닉네임으로 통한다. 늘 바른생활책대로 살려는 그의 스타일 때문.

그는 사업은 초심을 잃지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직원보다 더 부지런해야하고, 늘 솔선수범하고 모범을 보여야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란다.

그는 벤처열풍에 묻혀 엄청나게 물의를 일으키고 폐해를 입힌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봐온탓에 초심과 기본에 대해서는 냉정한 잣대를 요구한다. 두번째 방법론은 성공아이템을 찾아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

세번째는 ‘네트워크론’을 제시한다. CEO들이 의외로 네트워크에 대해 관심이 적다. 하지만 개개인의 밸류를 키우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필수이다. 서로 손을 잡아야 한다. 그가 벤처기업협회 등 각종 협회와 학회활동을 부지런히 하는 것도 네트워크론의 중요성때문.

CEO 조현정의 경영스타일 역시 독특하다. 비트컴퓨터 회사내에서는 “시키지 않은 일을 왜했어?”라는 말은 아예 없다. 늘 직원들이 알아서 처리한다. 사장결제가 없어진지는 이미 오래된 일.

이미 1990년부터 이익의 33%를 직원들에게 성과금으로 분배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트컴퓨터에는 개개인의 승진을 개개인 스스로 승진신청을 하는 독특한 인사방식을 오래전부터 고집한다.

내가 차장이나 부장, 이사로 승진을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 스스로 승진신청서를 작성, 제안을 하는 것.

창업 23년째를 맞는 비트컴퓨터 조현정 사장. 이젠 지긋 지긋하고, 그래서 제법 꽤도 부리고 개인적인 부의 축적에도 관심을 가질 법 하지만, 스타CEO 조현정사장은 지금껏 초심을 간직하고 있는 모범 벤처기업가이다.


조현정, 그는 누구인가

1957년 경남 김해생. 검정고시와 용문고, 인하대 전자공학과 졸업. 대학 3학년 재학시절 대학생 벤처 1호인 비트컴퓨터를 창업한 1세대 벤처기업가.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 뛰어난 친화력과 리더십이 강점. 늘 주위에 사람이 많은 벤처산업계 마당발. 2000년 벤처기업 최고의 영예인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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