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우 파일 94]

PCS와 EDPS

김증모(한국TDB 고문)

‘정보’(情報)라는 용어가 생소하던 1960년대는 ‘자료’라는 용어가 주로 쓰여지고, 오늘날의 ‘정보처리’도 ‘자료처리’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는 컴퓨터가 출현하기 이전으로 ‘펀치 카드시스템(PCS)’에 의해 자료처리가 이루어 졌다.

오늘날의 컴퓨터가 ‘다기능 자료처리 기계’라면, 이 PCS는 단기능 기계들의 복합구성으로 형성된 시스템이었다. 천공기(Punch Machine)가 카드에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자료를 수록하였으며 그 다음의 모든 처리는 이 카드를 매체로 하여 진행되었기 때문에 ‘Punch Card System’로 불려졌던 것이다.

이 PCS는 분류기(Sorter), 조합기(Collater), 통계기(Tabulater), 회계기(Accounting Machine), 계산천공기(Calculating Puncher)로 구성되어 순서에 따라 작업이 이루어 졌다.

즉 분류기에서 자료 분류, 조합기에서 비교 대조, 통계기에서 코드별 계수작업, 회계기에서 가감의 계산, 계산천공기에서 가감승제의 모든 계산을 처리하였으며 계산 결과 등의 출력은 회계기로 최종결과를 작성하였다.

기계와 기계사이는 사람이 카드를 옮겨가며 수작업으로 진행하였으며 프로그램은 각종 기능이 지정된 기반위에 배선하였는데 이것을 ‘Wiring’이라고 불렀다. 입력기능의 위치와 출력기능의 위치를 배선으로 연결하면 입력내용이 그대로 출력되었다. 가감산은 8자리수 10개조 정도 처리할 수 있었다. 회계기에는 이를 처리하는 카운터가 있어 이곳을 배선이 거쳐가면 계산이 이뤄졌다. 계산천공기에도 회계기와 비슷한 수의 카운터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계산 기능은 전구만한 크기의 진공관에 의해 이루어 졌다.

국내에 PCS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60년. 10년 마다 실시되는 인구?주택 센서스(당시는 국세조사라 부름)를 위하여 통계국(당시는 내무부소속, 현재는 통계청)에 도입되었다. 이 때 PCS의 프로그램(당시의 Wiring)을 습득하기 위하여 10여명이 일본에서 연수를 받았다. 이 연수에는 이규설, 한필봉, 최부일, 김동희, 육종국, 김유석, 박형곤, 김경한, 김봉한, 유진황, 이지상 씨 등이 참가하였으며, 이 중 일부는 현재도 정보기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자료처리 요원은 1961년 2월 준 공무원 신분으로 첫 공개 채용하였는데, 이 때 적성검사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된 것으로 생각된다.

선발된 1차 요원은 20여명으로 주태섭, 신현준, 이정국, 송노익, 장용진, 계훈방, 전무조, 이규진, 이소하, 조병우, 조기태, 김규식, 곽창권, 손기강, 김순환, 주석모, 한덕환, 김증모 씨 등이다.

PCS는 이와 같은 대형업무가 완료된 후에도 자체의 각종 통계조사 자료처리에 사용되었고, 1967년 현재와 같은 컴퓨터가 도입되기전까지 ‘자료처리기계’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컴퓨터 초기 도입시 애환

1966년에는 10년마다 실시하던 인구센서스(총인구조사)가 5년 단위로 시행시기가 바뀌어 이를 집계하기 위하여 컴퓨터 도입이 추진되었다. 이 당시 국내에는 미8군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어서 프로그램의 개념은 물론 컴퓨터 외관마저 구경하기 어려운 때였다.

이에 따라 1966년 8월 PCS 경력자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프로그램 연수를 받게 되었다. PCS에서의 ‘Wiring’은 지시한 처리절차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으나, 컴퓨터에서는 프로그램 개념이 내장방식(Stored Program)이고 문자로 된 약어(명령)를 사용하여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어서 사용방법을 습득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으나 시험에서는 모두 통과하여 수료증을 받았다.

이 연수에는 이규설, 한필봉, 김동희, 박재수, 김증모 씨 등 5명이 참가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미8군의 컴퓨터를 빌려 프로그램 실습을 하였는데 밤 12시 이후부터 새벽까지 올빼미 실습을 하였다.

이때 미8군에는 한국인으로 정곤수 씨 등이 근무하였으며 정씨는 나중에 한국IBM의 초기멤버가 되었다.

컴퓨터(IBM 1401)는 이듬해인 1967년 도입되어 6월 24일 가동식을 가졌다. 한국정보기술전문가협회가 ‘정보의 날’(6월 24일)과 ‘정보의 달’(6월)을 정한 것도 여기서 연유되었다.

이날 가동식에는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장기영) 등 관공서와 공공기관 인사들이 주로 참석하였으며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데모 프로그램이었으나 당시에는 대단한 요술처리로 인식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용어로 ‘자료처리기계’ ‘자료처리시스템’(Electronic Data Process System)으로, 즉 EDPS라고 상당기간 불려졌다.

이 때 처음으로 공채된 프로그래머 요원으로는 엄익홍, 김규수, 이기효, 김원표, 추광호, 최희정 씨 등이 있었으며 프로그래머 양성기관이 없어 모두 자체에서 교육을 실시했다.

이 때 도입된 IBM 1401은 제 2세대 컴퓨터로 첫 입력은 천공카드(Punch Card)로 하고, 대량 저장매체로는 자기테이프(MT)를 사용하였다.

이 MT에 우리나라 인구 데이터를 수록하는데 수십권의 테이프가 필요하고, 도별로 한 번 분류 배열(Sort)하는데 10여 시간이 소요되어 주로 심야에 이 작업을 하였다. 이 당시 매스컴에서 컴퓨터를 소개할 때는 주로 테이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견학자가 약 1년간은 많이 찾아 왔는데 처리업무 보다는 대부분 장치별 성능에 대해 설명했다.

이 당시 프로그램 언어는??Autocoder??로 오늘날의??Assembler??와 유사한 것이며, 천공카드로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아무리 잘 된 프로그램이라도 카드의 순서가 한 장이라도 바뀌면 낭패를 보았다.

한편, 편리했던 점도 있었다. 지금은 프로그램이 주기억장치의 어디에 저장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당시 주기억 용량은 1만6,000자에 불과, 어떤 명령이 몇 번지에 들어 있는지 장치 밖에서 볼 수 있어 간단하게 손으로 바꿔 넣을 수 있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고나 할까.

이 컴퓨터는 다음 세대의 컴퓨터가 도입된 후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로서 박물관에 소장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생산성본부에도 이와 유사한 수준의 컴퓨터(FACOM 222)가 도입되고, 컴퓨터 관계 교육도 시작하게 되어 컴퓨터 시대가 개막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인구조사에 따른 대량자료 처리가 2년여의 작업으로 완료돼 컴퓨터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편, 자체 통계뿐 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적용업무의 수요도 증가되었다. 그래서 무역통계, 광공업통계 등 다른 공공기관의 업무도 일부 흡수하였다. 물론 이러한 통계업무만 대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계수작업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회귀분석의 계산에서는 주기억 용량이 부족하여 한 번에 계산할 수 있는 것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중간 결과를 산출한 후 종합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작업의 주도는 당시의 김만제 교수가 담당했었고, 프로그래머로서는 김규수 씨가 맡았었다.

이와 같이 컴퓨터 이용의 필요성이 양적으로 또한 질적으로 수요가 변화하게 되어, 보다 성능이 좋은 컴퓨터의 도입을 생각하게 되었다.

1966년 제2세대 컴퓨터의 일본 연수시점에서 이미 제3세대 컴퓨터가 발표되어 일본에서 도입을 검토하는 단계였다. 그래서 제3세대(IBM 360형) 컴퓨터 도입을 위해 1968년 4월 다시 일본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오늘날에도 쓰고 있는 ‘COBOL’ 언어 등을 처음 배우게 되었다. 이듬해인 1969년 4월에는 컴퓨터 처리를 통한 수요예측 기법 등 컴퓨터를 관리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기법 등의 연수를 거치면서 컴퓨터를 이용하는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컴퓨터는 이용하면 할수록 고성능 컴퓨터를 찾게 됐다. 1971년 9월에는 제3세대에서 다시 3.5세대(IBM 370)을 향하여 다시 연수를 떠나게 된다.

1970년대 들어서는 일반기업에서도 컴퓨터 도입이 시작되면서 공공기관의 경력요원이 일반기업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어 공공기관은 요원양성기관의 역할도 맡게 된다.

<2005/10/01>


Posted by 한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