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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정보혁명 발아(發芽)


신충우(전기신문 취재부 차장)


1983년 정보산업의 해이자 세계통신의 해

1982년과 83년은 한국 정보통신의 여명기. 그동안 독자적으로 추진돼온 컴퓨터와 통신기술이 이때부터 국내에도 디지털을 통해 결합되기 시작, 정보(情報)와 통신(通信)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도래하는 정보화사회의 기반조성을 위해 개국이래 최초로 정부주도로 정보통신혁명이 시작된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82년에는 정보통신혁명의 허브(중심축)로 한국통신(한국전기통신공사 약칭)과 데이콤(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 약칭)이 설립됐다. 전신전화사업이 단순한 의사전달 차원을 떠나 미래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함에 따라 이해 1월 1일 한국통신(KT)이 발족되고 이어 3월 29일 정보혁명이라는 새로운 변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데이콤(주)이 설립됐다.

1983년에는 ‘정보산업의 해’이자 ‘세계통신의 해’로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개최돼 정보와 통신에 대한 인식을 국민들에게 새롭게 부각시켰다. 과거에는 통신이 사치품이나 장식품으로 취급을 받아왔으나 다가올 정보화사회(情報化社會)의 주요 요소로 인식되고 각종 서비스의 개선이 이루어 졌으며 통신기기의 수출도 크게 늘어났다.

우선 1983년의 정책?운영부터 살펴보자. 체신부(현 정보통신부)는 3월 기존의 전화망을 이용해 데이터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공중통신망(PSTN)을 개방했다. 이는 음성통신에만 이용되던 PSTN을 비음성계인 데이터통신을 위해 개방한 것으로 정보화사회로의 진입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 다음으로 무선통신의 개방이 1982년말 무선호출기에 이어 9월 코드리스폰에도 허용됐다. 코드리스폰은 1차적으로 서울?수도권에만 개방됐다. 1984년 상반기 개방할 예정인 카폰도 1983년 표준규격이 정해졌다. 이해 맹인들도 아마추어무선사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조치했다.

특히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부)는 1983년을??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하고 컴퓨터마인드를 확산하는 한편 개국이래 최초로 각급 학교에 8비트 개인용컴퓨터(PC) 5,000대를 보급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1982년 사람이 아닌 PC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 PC의 중요성을 전세계에 부각시키기도 했다.

한편 한국통신은 당초 1983년 전자식 77만회선, 기계식 20만회선 등 97만회선을 증설할 예정이었으나 전자식부문에서 2만회선을 초과달성했다. 이와같이 대폭적인 회선증설에 따라 서울시내의 경우 전체 39개 전화국 중 청약즉시 가설 가능한 전화국이 24개로 61%를 차지했다. 전화적체가 점차 해소되어감에 따라 국민들에게 경제적 부담과 불편을 초래한 청약금 제도는 존재 의미를 상실해 갔다. 또 1983년 전화 자동화율이 93%, 전자화율은 34%로 높아졌다.

1983년은 정보화사회의 기반이 될 종합정보통신망(ISDN)의 기초가 다져졌다. 신설된 전자식 전화회선중 11만8,000회선은 NO4 ESS 교환기에 의해 국내 최초로 선보인 디지털 전전자방식이다. 8월부터 국제전화도 24개국과 자동화됐다. 종전에는 국제교환을 불러 전화를 신청, 통화를 해야만 했다. 1982년부터 실시한 특수서비스도 1983년 3인통화, 직통전화, 지정시간 통보 등 3개서비스가 늘어 7개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업무 개선 외에도 한국통신은 세계통신의 해를 기념하는 전기통신전시회를 8월 보름에 걸쳐 서울 영동종합전시장에서 개최했다. 우리나라 통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각종 통신 기기가 전시됐다. 다가오는 미래통신에 역점을 둔 이 전시회에는 국내 33개업체와 해외 14개업체가 참가했다. 이 전시회는 정보화사회에서의 통신의 역할과 중요성이 관람객들에게 피부로 전달됐다.

정보통신면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데이콤은 2월 해외데이터통신을 개통, 가입자들이 해외의 각종 정보를 즉시 입수, 활용하게 했다. 이것은 고도정보산업의 육성 발전에 크게 기여 할 것이다. 또 11월부터 경제뉴스서비스를 온라인 리얼타임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3년에는 학회 활동이 활발했다. 통신학회는 4월 춘계학술발표회를 시작으로 텔레마틱스와 데이터통신워크숍(4월) 전기통신국제학술대회(8월), 추계학술발표회(10월) 등 4회에 걸쳐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들은 모두 ??세계통신의 해??기념의 일환으로 열었다. 텔레마틱스와 데이터통신워크숍은 데이터통신의 한국적 수용태세정립, 이해 계층의 저변확대 및 텔레마틱스 사회에 있어서의 데이터통신정책과 경영전략수립 등이 다루어졌다. 전기통신국제학술대회는 전기통신연구소와 공동으로 주최됐는데 통신의 기능과 역할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 한편 통신이 미래를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한국정보과학회에서도 10차에 걸쳐 학술대회 및 세미나를 개최, 관련산업의 발전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제조부문을 알아보자. 1983년은 전화기 수출이 크게 늘어난 것이 특징이다. 미국이 전화기설치를 관급에서 자유구매로 전환, 수요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상공부(현 산업자원부)집계에 의하면 유선통신부문은 1983년 수출목표액을 4,500만달러로 잡았는데 1억6,000만달러가 수출돼, 355%를 초과 달성했다. 이중 87%인 1억4,000만달러는 전화기 수출액이다. 전화기수출의 주종은 맥슨전자와 나우정밀에서 생산한 코드리스폰. 무선통신부문은 8,500만달러가 수출돼 1982년에 비해 4.2% 수출액이 늘어났으나 당초 목표액인 9,200만달러에 미달됐다. 대우와 현대가 1983년 전자통신부분에 참여한 것도 기록될 만한 일이다. 1984년부터 디지털 교환기 AXE10을 생산키 위해 건립된 동양전자도 관심거리였다(국산 전전자교환기 TDX는 이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임).

한편 중소업체들의 모임인 통신공업협동조합은 공동판매액이 목표액 134억원에 크게 미달된 100억원에 그치고 말았다. 이 조합은 1983년 윤만복 태흥정밀 사장을 새 이사장으로 맞았다.

끝으로, 시공업계를 살펴보면 한국전기통신공사협회가 서울 오장동의 낡은 회관을 팔고 광화문 정우빌딩으로 분양 이전한 것은 이 업계의 큰 관심거리였다. 영남통신(주)이 국내 최초로 시공업자중에서 광통신케이블 공사를 한 것도 주목되는 사건이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었다. 전기통신전시회는 준비기간이 짧아 진행상 문제점이 노출됐다. 또 세계의 통신기기가 한자리에 모여 경쟁을 벌인 텔레콤83에 우리나라는 출품조차 하지 못했다. 7월에는 서울 공릉동에서 전화회선증설공사를 하기위해 통신맨홀에 들어갔던 전공2명이 매탄가스로 참변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다.


1982년 한국통신과 데이콤 설립

한편 1982년은 정보통신혁명의 허브로 한국통신과 데이콤(주)이 설립됐다. 또 원활한 통신서비스와 정보화사회를 위한 각종 행사와 업무개선이 줄을 이어 통신현대화의 초석이 다져졌다.

1982년 가장 두드러진 것은 1월 한국통신의 발족으로 체신부에서 관장하던 모든 통신업무가 공기업화된 것이다. 급팽창하는 통신수요를 해결하고 정보화사회를 조기실현하기 위해 공기업으로 한국통신을 발족한 것이다.

한국통신은 1983년 전국에 100여만 전화회선을 증설, 다소 적체를 해소시켰으나 전국적으로 50여만 회선이 적체돼 1983년으로 넘어갔다. 강남권 개발로 서울 영동전화국의 경우 적체가 2만회선에 달했다.

반면 전화놓기가 한결 수월해 졌다. 지역간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으나 전화국에 따라 여유시설을 확보, 즉시 승낙가설이 가능한 곳도 늘어났다. 서울의 경우 36개 전화국중 중앙?을지 등 18개국이 즉시승낙 가능한 여유시설을 갖췄다. 전국적으로는 54개국이 이에 해당, 전체의 53%을 차지했다.

이에따라 한국통신은 이들 전화국부터 전화판매전략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전화수요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 가정에서 두 대이상 전화사용을 억제하던??복수가입전화이용규정??을 개정, 원하는 만큼 설치해 주도록 했으며 승낙-가설-개통까지 소요되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처리절차를 대폭 생략했다.

1982년은 각종 전화서비스가 많이 선보인 해. 3월부터 사람을 대신해 주는 전자식전화특수서비스를 시작했다. 아직은 가입자들의 인식부족으로 크게 이용되지 못하고 있으나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이 특수서비스는 △단축다이알 △착발신통화전환 △통화중 대기 △부재중 안내 등 4종이다.

영국?호주와 국제모사전신(팩시밀리)도 6월부터 시작했으며 가계종합예금을 이용한 전화요금자동납부제도가 서울지역에 한해 1차로 실시하고 무선호출수신기도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시외장거리전화도 대도시구간에서 자동전화방식으로 92개구간이 바뀌었다.

특히 정부주도로 데이콤(주)이 3월 29일 발족됐다. 정보화사회의 조기실현과 반도체 컴퓨터 및 전기통신산업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 이 회사의 설립 취지이다. KBS, 삼성그룹 등 25개 공?민영회사가 출자한 이 회사는 9월 한국통신으로부터 특정데이터통신회선을 인수받아 본격 업무를 시작했다. 10월에는 대외 첫사업으로 체신환금관리사무소에 컴퓨터시스템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편 과기처는 1982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한국전자통신연구소 전신)에 용역을 주어 8비트 PC의 기본 사양을 정하고 5개 납품업체를 선정했다. 당시 교육용 PC납품업체 선정에는 14개 업체가 참여해 기준에 도달한 5개 업체가 선정됐다. 그 업체는 금성사(LG전자 전신, FC-100)를 비롯, 동양나이론(HYCOM-8) 삼보컴퓨터(TRIGEM-30) 삼성전자(SPC-1100) 한국상역(한국컴퓨터 전신 SPORTRIGT-1) 등 .

업계도 어느해 보다 활동이 활발했다. 광통신(주)이 3월 설립됐다. 미래의 통신으로 불리는 첨단기술인 광(光)섬유를 생산할 이 회사는 대한전선, 금성전선, 한국기술진흥 등 3개사가 공동으로 출자했다. 1983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광섬유 생산에 돌입한다.

전화기생산에 삼성그룹의 한국전자통신이 참여한 것도 주목됐다. 금성, OPC(동양정밀) 등과 함께 3파전이 예상됐다. 선두업체인 금성통신은 9월 전화기 생산 400만대를 돌파했으며 한국전자통신은 50회선용 사설전자교환기 개발에 성공, 해외수출에 나섰다.

10월 열린 무역박람회도 빼놓을 수 없는 정보통신계의 행사였다. 1980년대 초반 개발된 각종 통신기기가 전시돼 국내외 관람객들에게 우리의 기술수준을 과시했다.

통신공사업(通信工事業)계의 주목되는 사건은 경기도 광주에 세운 한국전기통신공사협회 훈련소. 5월 대지 4,200여평에 건평 1,200여평으로 본관, 기숙사, 운동장, 부속시설 등을 갖춘 이 훈련소는 공사인력양성에 획기적인 전기를 이룩해 나갈 전망이다. 1982년부터 통신공사업법의 개정으로 최초로 기술자 보수교육이 실시됐다.

정보와 통신은 신군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제5차 전기통신 5개년계획에 따라 서비스나 기술면에서 크게 나아지고 있으나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은 걸음마단계에 불과하다. 10년, 20년 후 우리나라의 정보통신은 어떻게 변모할까? 벌써부터 기대된다.

<198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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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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