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우 파일 227]
근·현대사의 전쟁은 모두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패권싸움에서 비롯됐다.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면 시장원리에 따라 다툼이 일게 마련이다. 세계사에 나오는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년)’도 그런 싸움이다. 표면적으로는 독일에서 일어난 신교와 구교 간의 세력 다툼에 유럽 각국이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참전한 전쟁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어다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국경지방인 알자스·로렌 지역의 석탄광을 확보해 유럽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에너지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30년 만에 끝났지만 그 후로 300년 동안 석탄 채광권 쟁탈을 위한 전쟁은 계속됐다. 30년 전쟁의 승리로 이 지역을 차지한 프랑스는 알퐁스 도데의『마지막 수업』의 무대가 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1870년에는 독일에 넘겨줘야 했다. 1차 세계대전 후에는 프랑스로, 다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이 주인이 됐으나 전후에 다시 프랑스로 반환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 출신인 슈바이처 박사도 독일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인으로 생을 마쳐야 했다.
19세기부터 세계의 열강들이 식민지 확보에 혈안이 된 것도 석탄과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남아시아와 일본을 잇는 석유 수송로를 봉쇄하고 있었던 미 해군의 근거지인 진주만을 무력화하기 위한 속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03년에 있었던 미국과 이라크간의 전쟁 역시 석유패권을 목적으로 한 전쟁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지구의 생명체를 존재케 하는 태양은 수소의 원자핵(양성자)이 서로 충돌해 열핵융합반응을 일으켜 방대한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는 행성이다. 과거 인류는 필요한 에너지를 이러한 태양이나 바람, 나무, 물, 동물 등 동일한 공간과 시간에서 지속적으로 생산되는 살아있는 자연에너지에서 찾아서 썼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일련의 ‘에너지 혁명’은 에너지 사용의 패턴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땅속에 묻힌 석탄을 캐냈으며, 펌프와 파이프로 퍼내기가 더 쉬워진 석유를 개발했고, 화석연료를 사용해 이차적으로 전기를 생산해서 사용했다. 인류는 불과 400년 만에 고생대 또는 중생대의 태양에너지가 5억 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화석연료를 고갈시키고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수년 내에 피크오일이 온다고 예측하고 있다. 2015~2018년으로 보고 있다. 머나먼 과거에 만들어져 재생산이 불가능한 죽어있는 화석에너지를 쓰게 되면서 인류에게는 에너지 수급의 불균형이라는 멍에가 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화에서 지역화로’를 슬로건으로 내건 트랜지션 타운은 피크오일 후를 대비하는 운동의 일환이다. 피크오일(Peakoil)은 석유생산량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다가 특정 시점을 정점으로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이다. 석유 소비의 급증에 비해 새로운 유전 발견이 부진하거나 정유시설의 미흡한 투자, 전쟁 등으로 석유 생산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 나타난다. 즉 피크오일은 석유의 매장량이 아닌 석유의 채취 여부와 관련이 있다. 석유 생산이 최고에 이르는 지점은 석유 생산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지점이 된다.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의 시대를 맞아 과학자들은 강력한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다양한 기술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삶터는 이런 기술 발전이나 어느 개인의 노력과 선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 직전에 다다랐다.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적 대안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태공동체를 연구하는 학자 김성균ㆍ구본영이 출간한『에코뮤니티』(이매진)에서 현재 상황을 생태위기로 규정하고 생태위기 극복의 방법으로 단순한 환경 보호 운동을 넘어선 생태공동체 만들기를 제안한다. 생태 위기는 전 지구적 차원의 환경오염 또는 환경파괴가 위험 수준에 이르러 동ㆍ식물뿐 아니라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현재 상황을 뜻한다. 즉, 환경 파괴로 인류와 동ㆍ식물, 그리고 그 밖의 자연을 포함한 비(非) 인류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이다. 생태공동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연과 괴리된 인간의 생활세계에 대한 반성과 생명체 사이의 조화성, 생명의 다양성에 대한 강조를 기초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정신이 공통으로 깔린 공동체다. 생태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고 관리하는 생활정치와 공생적 문화를 위한 사회구조, 자립적 에너지 구축 등을 모색한다.
생태공동체, 즉 생태마을은 쓰임새에 따라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다. 영어로는 에코빌리지(Eco-Village) 혹은 에코커뮤니티(Eeo-Community)로 부른다. 1998년판『유럽 에코빌리지 편람』에서는 이를 두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하나는 공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생태마을 그 자체이며 또 하는 생태마을을 지탱하고 유지하는 생태마을 정신[Eco-Village Initiative]이다. 전자는 의사결정 방식, 문제 해결 방식, 자치적 관리시스템 등 공동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들을 고려해 조성된 정주체계를 의미한다. 이런 정주체계는 농촌, 도심이나 주변부 또는 몇몇 도시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다. 후자는 시작 단계에 놓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암묵적으로는 이런 일들을 진행하기 위해 사회문화적으로 하나의 담론을 만들어가는 층위로 생태공동체를 설명하고 있다. 즉 자신들의 거주 공간을 통해 디자인, 건축, 도시 회생 등을 요구하는 다양한 견해와 상태를 후자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또한 지구적 생태마을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GEN(Global Eco-Village Network)은 생태공동체를 그 내용에 따라 지속 가능한 공동체, 의도적 공동체, 공동 주거, 마을, 생태마을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런 구분은 GEN이 추구하는 생태마을의 개념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사용되는 셈이다. 즉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마을의 개념과 차별화하려는 것이다.
생태공동체는 여러 가지 유형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생태공동체는 공동체 의미가 광역적으로 확산된다는 것에 의미가 크다. 그것은 자연과 괴리된 인간의 생활세계에 대한 반성인 동시에 생명을 중심으로 한 상호관계성, 광역적 의미의 공동체성, 생명의 다양성, 생명체 사이의 조화성, 생명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 그리고 생명의 다양성에 대한 강조를 기초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의 설정은 생태적인 것이 되며 공동체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표면화된 내용은 생태마을, 공동주거, 계획공동체 등의 물리적 조건을 가지고 나타나기도 하며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도록하는 영성․수련, 지역공동체를 주체적으로 만드는 마을 만들기, 대면성을 강조하는 지역화폐, 협동조합을 통한 생활공동체를 만드는 기능적인 형태를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양상들은 궁극적으로 생태공동체로 불리며 그 이념적 성향과 지향점은 더불어 사는 삶과 생태학적 생활양식이다.
지구적 생태마을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GEN의 힐더 잭슨은 1996년 출간한『생태마을이란 무엇인가』에서 생태공동체가 지닌 운동의 네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있다. 잭슨은 생태마을을 도시와 농촌에 구성된 지속 가능한 정주체계이며 네 가지 요소의 시스템에 의해 순환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그 네 가지 요소는 인간 속에 그리고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는 지구, 물, 불, 공기이다. 이 네 요소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 걸쳐 하나의 유기적 전체의 성격을 띠면서 각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지구는 물리적 구조(생태학), 물은 사회간접자본, 불은 사회적 구조, 그리고 공기는 문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생태 위기에 대한 공동체적 대안으로 세계화에서 지역화, 집중화에서 분권화, 획일화에서 다양화, 거대화에서 분산화 등이 생태 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트랜지션 타운운동도 생태 공동체의 일환이다.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생활이 익숙해지면 이전에 몰랐던 부분에 대해 감사하며 여러가지 덤으로 얻는 것도 많을 것이다. 잃으면 반드시 얻는 것도 있다. 이제 다시 지역화로 돌아가 소규모 공동체나 개인적으로 텃밭을 직접 가꾸는 것도 고려해봐야 할 대다.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게 살았고 우리 몸은 유전자에 의해 그렇게 설계돼 있다.
가구루족은 자연에서 사유개념없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대표적인 원시부족이다. 전체 부족 구성원은 200여명이며 20, 30명단위로 공동체를 이룬다. 특히 현재의 삶에 감사하며 먹을 거리에 항상 감사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대자연을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시간 개념 없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고 사냥과 수렵은 먹을 만큼만 한다. 나무를 꺽어 얼키설키 만든 움막에 거주하며 2, 3주단위로 옮겨 다닌다. 아프리카 사바나의 유랑자들이다. 이들에게 사유 개념은 없으나 부족을 이어갈 아이들이 유일한 재산이다.
이 원시부족의 영아 사망률은 약 50%로 문명세계 OECD평균 1,000당 4.9명보다 매우 높지만 야생동물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아프리카 최고의 포식자 사자의 새끼도 생존률이 10%에 불과하며 해변의 모래에 알을 낳는 올리브각시거북의 부화 성공률은 5%이다. 산토끼는 태어나 1년 이상 생존하는 경우가 드물다. 천적이 비교적 적은 북극 곰의 새끼는 30%가 생존, 비교적 높다.
자연은 어머니와 같다. 자연은 생태계의 근원이며 끝없는 생명력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우리는 개발과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생명의 원천인 자연 앞에 가부장적 질서를 적용해 왔고 그 결과 자연은 생명을 잉태하는 어머니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사회 시스템은 중앙 권력, 거대 자본, 획일적․일방적 의사소통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의 희생을 당연시 해왔다. 여기서 약자는 여성과 자연으로 생명의 원천인 이들에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1980년대 등장한 생태페미니즘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생명을 잉태해내듯이 자연이 끝없이 생명을 잉태해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980년대 아니키스트 철학자 머레이 북친은『자유의 생태학』(1982년)에서 생태와 사회 간 위계질서의 회복을 주장했다. ‘지배와 위계’가 ‘평등과 자유’로 대체돼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생태학적으로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남성은 여성과 아이를 지배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를 지배하고, 주인은 노예를 지배하는 등 지배는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통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배는 정신에 대한 물질의 지배, 노동에 대한 쾌락의 지배, 정신에 대한 육체의 지배 등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자연스럽게 지배해 온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생태위기 시대를 대표하는 명확한 쟁점은 통념에 가까운 ‘기계론적 패러다임’에서 ‘생태학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라는 시대적 요구이다. 이런 요구는 노르웨이 철학자 네스에 의해 제안됐다. 그는 1972년에 발표한 ‘표피적 생태운동’과 그 다음 해의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생태운동’이라는 논문에서 주장했다.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둘러싼 논의는 여전히 오염과 자원 고갈에 대비해 법적․제도적 해결책만 고집하는 환경관리주의 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적 관심을 유발하는 생태적 대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자아는 두가지 의미로 연기설의 대자아((對自我)와 소우주 개념의 큰 자아인 대자아(大自我)를 말한다. 이들 대자아는 생물권에 대한 인간의 권리행사에서 겸손과 겸양, 진화에 대한 경외심을 우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토지공동체의 평범한 구성원이자 시민이다. ‘삶의 터’ 그 자체가 공동체여야 한다. 땅은 우리의 삶의 터다. 땅을 거스르지 않고 함께 사는 방법, 더 나아가 땅과 더불어 그 자연적인 지역 안에서 그 방식과 리듬에 따라 사는 방법을 깨닫는 것이 생태위기 시대의 삶의 터를 올바르게 만드는 길이다. 한 가정,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서뿐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대자아의 역할이다. 일반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소자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대자아가 없다. 대자아는 인식하는 순간 나타나며 인식하면 할수록 커지는 존재이다. 생태적 대자아의 역할은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지구촌에, 지구인에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첫째로 지적 호기심의 충족, 둘째 단계로 자기의식의 강화, 세 번째로 세계와의 관계성 정립이라고 하는, 자아의 존재성 구축의 단계들을 가지는데 이는 세 번째 단계이다. 녹색소비자의식이 생태적 대자아의 시작이다.
오늘날 세계는 매장 자원의 고갈, 가격의 상승, 대체에너지기술 개발의 지연 등으로 이미 보이지 않는 에너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국제사회는 불가피하게 기후변화협약의 후속조치로 국가별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와 기업에 대한 탄소세 적용 등 새로운 무역장벽을 국제규범화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녹색경제체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오늘날은 원천기술을 보유하지 못하면 거대한 로열티를 지불하는 기술식민화가 되지만 앞으로는 생산에서 소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녹색경제시스템으로 전환하지 못하게 되면 막대한 탄소세를 감당해야 하는 탄소식민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탄소주권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업혁명 이전의 살아있는 자연에너지원을 사용하는 것이다.
1초 동안 지구가 받는 태양에너지를 모두 전기로 바꿀 수 있다면 세계 최대의 발전 용량을 자랑하는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이타이푸 수력발전소보다 1,400만 배(2007년도 세계 전력생산량의 100배) 정도나 많은 발전량을 얻을 수 있게 된다.미국 남서부 모하비사막에 태양발전 골드러시가 일고 있다.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등 4주에 걸쳐 있는 이 사막에 ‘에너지대박’을 노리는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미국재생에너지연구소는 이 사막을 비롯해 미국 남서부지역에서 현재 미국 전체 발전량의 10배에 달하는 1만1,000GW규모의 태양열 발전이 가능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경제위기 속에서도 모하비사막의 태양발전 러시는 멈추지 않는다. 2009년 3월 현재 199건의 태양발전용 토지임대 신청이 들어왔다.
태양광 발전보다 뒤늦게 출발했지만 2009년 현재 건설 중인 CSP 발전소만 해도 약 1,000MW로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을 시작으로 2012년 이후에는 전세계로 확대 건설되면서 2020년까지 CSP 시장은 연평균 약 50%씩 성장해 최대 18GW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단가가 화석에너지를 이용한 발전단가와 같아지는 그리드 패리티 시기도 CSP의 성장과 함께 앞당겨질 전망이다. CSP의 그리드 패리티의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일사량이 높은 미국과 스페인의 경우 전기요금이 매년 5% 정도 상승한다고 가정했을 때 2015년 전후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열저장 장치 및 용매, 반사거울과 같은 CSP의 시설 및 장치부문에서 비용을 줄인다면 발전단가도 2020년까지 30%~40%정도 낮출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적으로 CSP는 태양광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할 전망이다. 2007년 태양에너지는 글로벌 전체 에너지의 1%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중 CSP가 차지하는 비율은 단지6%에 불과했다. 그러나 2050년에 이르면 CSP는 연간 ,300TWh~4,800TWh을 생산해 태양광 발전과 비슷한 크기를 차지할 전망이다. 또한 2050년 이산화탄소 감축 시나리오에 따른 그린 에너지 역할 비중에 있어서도 태양광 발전과 CSP는 4~7%로 서로 같다. 향후 CSP는 태양열 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의 대규모 발전 부분에 특화돼 있어 80% 이상이 100㎾ 미만으로 도심지의 소규모 발전이 대부분인 기존 태양광 발전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형태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태양열 발전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지만 대규모 전력 생산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존의 태양광 발전 및 태양열 온수기와 함께 미래 태양에너지 시장의 주축이 될 전망이다.
<저술가 한재 신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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