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우 파일-83 ]

신충우(u-Corea포럼 회장)


우리나라는 2004년 총 196억달러 규모의 반도체를 수출했다.

이는 국내 전체 수출의 17.5%를 차지하는 것으로 반도체는 1992년 이후 13년째 수출 1위 자리를 지킨 효자상품이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1993년 이후 11년 연속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D램은 12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1위를 차지하는 등 반도체 강국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삼성전자는 2005년 10월 29일 경기도 화성의 반도체 공장에 오는 2012년까지 330억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제2 단지 생산라인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화성 2단지에 차세대 제품 생산을 위한 첨단 반도체 신규라인 8개 및 50나노급 이하의 미래형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12인치 신규 연구개발(R&D) 라인 1개 등 총 9개의 신규 라인을 건설할 방침이다.

신규 라인이 모두 완공되면 기흥(43만평)-화성(48만평)에 걸쳐 총 91만평 규모의 세계 최대??반도체 생산단지(Semicon-Cluster)??가 탄생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1974년 반도체 사업진출 이후 최대 규모인 이번 투자를 통해 오는 2012년까지 반도체 매출 610억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세계 초일류의 종합반도체 업체로 제2의 도약을 이룬다는 계획이다.

반도체 산업은 1947년에 최초 반도체인 트랜지스터가 발명된 후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 과정에 들어갔다. 미국은 반도체를 방위 산업, 항공우주 산업에 주로 사용했으며 일본은 라디오와 같은 가전제품에 주로 이용했다.

“반도체 경기가 좋지 않다고요? 우리는 아닙니다.”

2004년 7월 16일 오전 8시 경기도 기흥에 자리잡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 발표를 몇 시간 앞두고 실적 추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황창규 반도체 총괄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과연 2?4분기 반도체 부문의 매출은 전분기 대비 13.2% 늘어났고 영업이익은 20.8%나 늘어났다.

특히 분기별 매출과 영업이익은 사상 최초로 4조원과 2조원을 각각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의 ‘캐시카우(수익 창출원)’역할을 해왔던 휴대폰 사업의 수익률이 하향세로 돌아서고 디지털미디어와 생활가전은 적자로 돌아선 마당에 반도체가 유일하게 버팀목 역할을 해낸 것이다.

황 사장 개인적으로는 연초 반도체 총괄사장을 맡아 비교적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셈이다.

황 사장은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의 눈부신 약진으로 2002년 자신이 제기했던‘ 메모리 신성장론’을 입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이 이론은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트의 수석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 주창했던 ‘무어의 법칙’과 비교해 ‘황의 법칙’으로 불려왔다.

반도체 칩 하나에 집적될 수 있는 트래지스터 수가 1.5년에 두배로 늘어난다는 것이 무어의 법칙이었다면 황의 법칙은 디지털기기의 반도체 수요 증가에 힘입어 반도체 집적도가 1년에 2배씩 늘어난다는 것.

“반도체는 진화를 거듭하는 IT의 핵심 부품입니다. 지금 당장 공개할 수는 없지만 반도체 성장의 새로운 모티브를 공유하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학회인 VLSI도 벌써부터 그의 수정 이론을 고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국에서 반도체 산업이 시작된 시기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으로 올해로 꼭 30년이 지났다.

이전에도 제품을 조립하는 패키지 라인이 일부 있었지만 웨이퍼를 가공하는 팹(Fab)은 1974년 10월 한국반도체가 준공한 부천 공장이 시초다.

한국반도체는 경영상 어려움으로 공장을 준공한 지 두 달 만인 12월 삼성전자에 인수됐다.

그것도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재를 털어 자금을 마련했다.

삼성그룹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사재를 들일 정도로 이 회장은 반도체 산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시장과 기술의 흐름에 정통한 이 회장은 전자산업의 핵심은 반도체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은 노동집약적 단순 조립 형태였다.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부품을 수입해 납땜으로 조립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핵심부품인 반도체의 국산화 없이는 이러한 상황을 탈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국내 기술로 처음 개발된 반도체는 일명 ‘워치 칩’이라 불리는 제품으로 전자 손목시계에 들어가는 반도체였다. 하지만 이 제품은 시장에 출시도 못해보고 개발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 반도체 회로는 큰 방에 모눈종이를 펼쳐놓고 그 위를 기어다니며 그려야 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원시시대’나 다름없었다.

1983년 2월7일 밤. 일본 동경 오쿠라 호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의 결정에 따라 삼성의 앞길이 바뀌게 될 것이었다.

밤을 꼬박 새운 이 회장은 날이 밝자마자 홍진기 당시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도체를 하기로 결심했소. 이제는 누가 뭐래도 반도체를 밀고 나갈 것이니 이 사실을 내외에 공표해 주시오.”

삼성의 운명을 가른 이병철 회장의 ‘2.8 동경 선언’은 이렇게 터져 나왔다.

이병철 회장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일본에 건너가 장고(長考)하는 버릇이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 회장의 1983년 동경 체류를 예의주시했다. 뭔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돌았다. 그리곤 예측대로 ‘반도체 진출 선언’이 터져 나왔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는 표면적으로 이 회장의 ‘2.8 동경선언’에서 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이 구상이 발표되기 까지는 10년에 가까운??드러나지 않은??준비기간이 있었다.

이 회장은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고 이를 비교 분석한 후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서야 최종 결정을 내리는 ‘신중한’ CEO였다.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정하기에 앞서 이 회장은 미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들을 만났고, 반도체에 관한 수백권의 책을 섭렵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고부가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그가 선택한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산업이 바로 ‘마법의 돌’ 반도체였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하기에 앞서 완벽할 정도의 검토와 준비를 거쳤다.

최종 결정에 앞서 이 회장은 과연 반도체사업을 해도 되는 것인지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동경구상 발표 한달 전인 1983년 1월. 이 회장은 6명의 미국 출장팀을 실리콘밸리에 파견, 현지 기술자료를 입수해 구체적인 사업계획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수차례 검토한 내용이었지만 이 회장은 한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출장팀은 실리콘밸리에 대한 면밀한 현지 검토를 거쳐 “향후 5년간 시설투자 4,400억원, 연구개발비 1,000억원을 투입해 첨단기억소자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연간 1억개 이상 생산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위험과 모험이 가득한 분야이긴 하지만 기술개발만 적기에 이루어진다면 그 이익규모는 천문학적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의견이 새로 첨부됐다.

이 회장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고, 며칠 후 동경선언을 발표한다.

당시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 선언을 놓고 국내외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느니 ‘ 불가능한 사업’이라느니 하며 혹평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삼성의 반응은 차분했다. 이미 충분한 사전조사를 거쳐 “도전해 볼만 하다.”는 내부판정이 내려진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삼성의 진출 이전에도 국내에 반도체 산업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 수준은 극히 열악했다.

1960년대 중반 미국 반도체 제조업체인 페어차일드가 한국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반도체 제조업이 시작됐다. 그 뒤를 이어 미국 모토롤라, 시그네틱스, 일본의 도시바 등 세계적인 반도체 업체들이 잇따라 한국에 진출했다.

이들이 한국에 공장을 건설한 이유는 간단했다.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이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반도체 조립에 필요한 원료와 기기를 들여와 노동집약적인 조립공정만을 한국에서 처리했고, 완제품은 전량 모회사로 가져갔다. 껍데기만 반도체 공장이었지 실제로는 단순 조립라인에 불과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금성사와 아남산업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조립공정에 불과할 뿐 제조기술을 갖춘 실질적인 반도체 생산은 아니었다.

국내에서 반도체 생산을 위한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나선 것은 삼성이 처음이었다.

삼성의 반도체 역사는 1974년 ‘한국반도체’인수로 부터 출발한다.

한국반도체는 한국과 일본 합작으로 설립돼 국내에서 처음으로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가공을 시작했지만 곧바로 자금난에 빠졌고, 공장 준공 2달만에 삼성에 인수되는 비운을 맞는다.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건희 회장은 한국반도체가 부도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재를 털어 지분인수를 추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은 한국반도체 인수 후 1975년 전자손목시계용 집적회로칩을 개발, 전자손목시계의 국산화에 성공한다. 당시 삼성이 개발한 전자손목시계는 대통령 사인이 들어간 청와대 기념품으로 제작돼 외국 국빈들에게 선물용으로 전달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듬해 삼성은 국내 최초로 트랜지스터 생산에 성공하는 한편 부천공장에 최첨단 3인치 웨이퍼 설비를 갖추는 등 반도체 생산업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10년 뒤 정식으로 D램 생산에 뛰어들기에 앞서 하나하나 기초체력을 다져 나가던 시기였다.

동경 선언이 발표되기 6개월 전인 1982년 9월. 이 회장은 그룹 신사업추진팀에 반도체산업 전반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라고 지시했다.

추진팀은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부천 반도체사업본부 2층 구석방에 틀어박혀 보고서 작성작업에 착수했다. 방대한 자료수집과 시장조사, 사업성 분석작업이 진행됐다.

한달여의 작업을 거쳐 추진팀은 100쪽 분량의 두툼한 보고서를 이병철 회장에게 제출했다. 보고서는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 이후 삼성이 벌여온 반도체사업 전반을 재평가하고, 제품별 전망 및 경쟁력 분석, 향후 사업추진방향 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던 이 회장은 “첨단 반도체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이 미국을 앞선 분야가 메모리”라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메모리를 중심으로 사업계획서를 다시 작성해 올리라고 지시했다.

보고서 분석대로 “일본이 미국을 앞설 수 있는 기술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게 이 회장의 판단이었다. 이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이 회장은 반도체사업을 메모리 위주로 추진해 나가기로 결정한다.

문제는 메모리 가운데서도 어떤 제품을 주력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D램, S램, EP롬, 마스크롬 등 수많은 메모리 제품 중 어떤 것을 중심으로 생산설비를 갖출 것인 지를 결정해야 했다.

S램은 제품 종류가 다양하고 D램보다 쉽게 제조기술을 터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장이 크지 않은게 단점이었다.

반면 D램은 시장규모는 크지만 미국과 일본 등 선발업체들간의 경쟁이 치열해 후발사가 뛰어들기에는 상당한 출혈이 예상되는 분야였다. 마스크롬과 EP롬은 기술확보 자체가 어려워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D램이냐, S램이냐” 이제는 결정만 남았다.

심사숙고 끝에 이 회장은 D램 시장에 도전하기로 최종 결심을 굳힌다. 선발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시장규모가 큰 D램 분야에 진출하는 것이 향후 경쟁력확보 차원에서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작은 시장에 안주하기 보다는 큰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승부를 가려 보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요즘 말로 ‘블루오션’이 아닌‘레드오션’을 선택한 대모험이었지만 이 회장의 결정은 단호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이병철은 반도체의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 본 인물이었다. 손톱만한 크기의 반도체가 천문학적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다.

2.8 동경선언 발표 직후 그는 삼성 직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철강 1톤을 생산하면 부가가치가 20만원밖에 안되지만 1톤짜리 자동차를 생산하면 500만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한다. 또 컴퓨터를 1톤 생산하면 3억원의 부가가치가 생기는데 반해 반도체를 1톤 생산하면 13억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한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반도체 진출에 대한 이 회장의 판단이 얼마나 확고했는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판단과는 별개로 주변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한 재벌기업 총수는 “미국 일본의 최고 기업들도 힘겨워 하는 반도체를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생산한다는 말이냐. 보나마나 3년도 못 가 실패하고 말 것”이라며 삼성의 결정을 비웃었다.

일본 기업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의 기술수준으로는 4년내에 반도체를 개발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대놓고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혹평했다.

정부도 우려의 뜻을 나타냈다. 국내 대기업이 반도체처럼 불확실한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실패할 경우 자칫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게 당시 정부의 우려였다.

2.8 동경선언은 이 같은 만류와 조소에 대한 이 회장의 정면돌파였다.

동경선언 10개월 후인 1983년 12월 삼성은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64KD램??독자 개발에 성공, 세계를 놀라게 만든다.

이어 삼성은 64KD램 생산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1984년 256KD램, △86년 1메가D램 △88년 4메가D램, △89년 16메가D램을 차례로 개발,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좁혀 나갔다.

마침내 1992년 64메가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기술격차를 극복하고, 미국 일본 등 반도체 선진국을 따라잡는데 성공한다.

2.8선언 이후 10년만에 이룩한 이 같은 놀라운 성과는 동경선언이 결코 무모한 시도가 아니었음을 결과로서 입증하고 있다.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이 회장은 과감하게 초강수의 패를 택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8 선언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삼성의 반도체 진출은 확정됐고,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투자와 집행이 이뤄져야 했다.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우수 인재 확보였다.

우선 재미 한국인 과학자들을 영입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초빙 1호는 제너럴일렉트릭과 IBM 연구원을 거쳐 캘리포니아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이임성 박사였다.

삼성은 이 박사를 통해 내셔널세미컨덕터와 자일로그사 등 미국 유수의 반도체 회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상중 이일복 이종길 박사 등 한국인 과학자들을 차례로 끌어들였다. 그 뒤를 이어 진대제 황창규 권오현 박사 등이 합류했다.

IBM 와튼연구소에 근무하던 진대제 박사는 “일본을 이기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며 기꺼이 삼성행에 동참했다. IBM은 진 박사를 붙들어 두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설득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일본보다 먼저 16메가D램을 생산해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다.”는 게 그가 밝힌 삼성행의 이유였다.

진 박사는 이후 4메가D램 부터 64메가D램 개발에 이르기까지 삼성전자의 반도체 연구개발을 이끄는 총책을 맡는다.

진 박사는 IBM을 떠나면서 장담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결국 5년만에 완벽하게 지켜냈다. 4메가D램을 일본과 거의 동시에 공급한데 이어 16메가D램을 일본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이다.

뒤를 이어 권오현 박사와 황창규 박사 등이 개발진에 투입되면서 삼성은 64메가D램과 256메가D램 개발에 잇따라 성공한다.

과감한 투자와 우수인재 확보를 기반으로 삼성은 반도체 진입 10년만에 기술력으로 세계 D램시장을 완전 제패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반도체를 만드는데 있어 기술인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생산공장이다. 반도체는 제품 특성상 다른 산업에 비해 고도의 정밀성과 청정성을 요구한다. 공장안에 미세한 먼지 몇 개만 떠다녀도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

이병철 회장은 동경 선언을 발표하기 반 년 전인 1982년 7월부터 반도체공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 공장의 특성을 감안해 “△공업용수가 풍부할 것 △공기가 청결할 것 △소음이나 진동이 없을 것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거리여야 할 것” 등 4가지를 부지선정 기준으로 제시했다.

삼성은 여러 요건을 감안해 수원, 신갈, 기흥 등을 1차 후보지로 선정하고 타당성 조사에 나섰다. 조사 결과 지하수와 전력공급, 토지분양 등에서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좋은 평가를 받은 기흥이 공장부지로 선정됐다.

삼성은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한 지 7개월 후인 1983년 9월 기흥공장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나섰다.

이 회장은 성평건 당시 삼성석유화학 공장장을 기흥 반도체생산공장 초대 공장장으로 임명하고 “반드시 6개월내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뒤늦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후발주자 입장에서는 단 하루라도 공기를 단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말그대로 시간은 금이었다.

성 공장장은 ‘양질시공, 공기단축, 공사비절감’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공사에 착수, 살인적인 공기단축에 나선다. 평균 2~3년이 소요되는 반도체공장 건설을 6개월 안에 마무리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가능한 미션이었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불도저 361대, 덤프트럭 674대 등 2,000여대의 중장비와 연인원 26만명이 투입됐다. 공휴일은 물론 신정, 구정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공사가 진행됐다.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엄동설한 속에 전쟁을 방불케 하는 건설작업이 이어졌다. 작업이 얼마나 혹독했던 지 삼성 본사 직원들은 기흥 건설현장을 ‘아오지탄광’에 비유하곤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된 공사 끝에 착공 6개월 만인 1984년 3월말 기흥공장이 기적처럼 완공됐다. 국내 반도체산업의 메카인 기흥밸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983년 12월1일 강진구 당시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뭔가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나돌았지만 반도체 관련 발표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6개월만에 반도체를 개발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뭔가 다른 것을 발표할 것 같다.”는 게 현장에 모인 기자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기자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강 사장이 준비해 온 발표문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삼성반도체통신이 64KD램을 개발했습니다. 불과 6개월만에 생산 조립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한국 반도체 기술격차를 4년 정도로 좁히는데 성공했습니다.”

발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물론 경쟁업체 관계자들 모두가 경악했다. 미국과 일본이 6년 이상의 연구개발 기간을 거쳐 성공한 64KD램 개발을 이제 막 반도체 진출을 선언한 삼성이, 그것도 개발에 착수한 지 불과 6개월만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반도체를 생산할 기흥공장은 아직 채 지어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삼성의 64KD램 개발 소식이 외신을 통해 알려지자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64KD램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던 미국과 일본은 물론 D램 사업진출을 검토하고 있던 서독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방 선진국가들이 모두 경악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삼성의 64KD램 개발 소식에 반신반의했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성이 보내온 샘플을 시험해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히 정상 작동되는 반도체였고, 샘플에는 삼성 로고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64KD램 개발 작업은 2.8 동경선언이 나온 지 석달 뒤인 1983년 5월부터 시작됐다. 칩 디자인 기술을 제공키로 한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로 부터 기본 설계도면을 넘겨받아 개발작업에 착수했다.

6월17일 마이크론사와 정식으로 기술계약을 체결하고 64KD램 3,000개를 제공받아 조립작업에 들어갔다. 조립공정 부터 개발하고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기술을 기반으로 가공 및 검사기술 까지 개발하겠다는게 삼성의 복안이었다.

개발팀은 조립 시험생산에 들어간 지 40일만에 생산수율을 일본과 맞먹는 92%까지 끌어 올렸다. 64KD램의 조립공정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비록 조립공정이었지만 우리 자체 힘으로 64KD램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개발팀은 곧바로 공정개발에 착수했고, 11월7일 마침내 309가지에 달하는 반도체 생산공정 개발을 모두 완료했다. 미국과 일본이 거쳐야 했던 4KD램과 16KD램 개발과정을 뛰어 넘어 단번에 64K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이었다.

삼성은 비록 설계도면을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서 들여와 시작하긴 했지만 309가지에 이르는 공정기술과 검사조립기술은 단 6개월만에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64KD램 개발에 6년 이상을 소요한 일본과 비교할 때 삼성의 기록은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사건이었다.

1992년 9월25일은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새 지평을 개척한 날’로 기록된다.

삼성전자는 이날 세계 최초로 64메가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드디어 일본을 따라잡고 세계 최정상에 올라섰음을 공식 선언하는 자리였다.

삼성의 64메가D램 개발은 곧바로 반도체 업계의 순위 변동으로 이어졌다.

미국 데이터퀘스트사는 1993년 5월 “1992년 반도체시장을 분석한 결과 D램 분야에서 삼성이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 메이커로 올라섰다.”고 공식 발표했다. 삼성의 매출액은 11억9,200만달러, 세계시장 점유율은 13.5%였다. 도시바의 11억2,300만달러, 12.8%를 능가하는 실적이었다.

이후 D램 시장에서 삼성의 독주는 가히 파죽지세였다.

64메가D램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94년 8월 삼성은 또다시 ‘256메가D램 개발’이라는 메가톤급 발표를 내놓는다. 경쟁사인 미국이나 일본 업체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잇따라 세계 최첨단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256메가D램 개발에 이어 삼성은 1996년에는 1기가D램을 개발, 반도체의 세대교체를 이끌었다. 2001년에는 마침내 4기가D램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2004년에는 60나노 플레시메모리를 최초 개발함으로써 반도체시장을 이끄는 선두주자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과시했다.

반도체사업에 진출한 지 이제 22년. 삼성은 기술력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정상 자리를 확보하는 한편 이병철 회장이 예견했던 ‘천문학적 수익’의 기반을 확고히 다진 셈이다.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드라마틱한 성장과정을 거쳤다. 불가능하다는 주변의 무시와 조소를 이겨내고 한국 반도체 산업은 고난의 꽃을 피웠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기적이라느니 신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에 이어 이제는 반도체를 통해 전 세계에 ‘황색 실리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삼성에 이어 현대도 뒤따라 반도체산업에 진출하면서 황색실리콘 돌풍의 공동주역으로 떠올랐다. 양대 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나서면서 한국은 세계 1위의 D램 생산대국 반열에 올라섰다.

실제로 2005년 1?4분기중 D램 매출은 △삼성전자 17억4,900만달러, △하이닉스반도체(전 현대전자) 9억3,900만달러로 한국 업체가 나란히 세계 1,2위를 석권했다. 시장점유율은 삼성이 30.6%, 하이닉스가 16.4%를 차지해 전세계 D램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하고 있다.(실리콘 스트래티지스트誌 8월3일자)

반도체가 한국의 대표상품이자 수출효자 품목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하고 있는 셈이다. 1983년 고뇌에 찬 이병철 회장의 결단이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황색 실리콘 돌풍’의 촉발제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Posted by 한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