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우파일-84]

신충우(u-Corea포럼 회장)


시분할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 개발은 한국 정보혁명의 원동력이 됐다.

우리나라 통신산업은 TDX 국산화를 통해 기술자립 시대를 앞당기고 이 과정에서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이동통신 등 첨단 IT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TDX국산화는 오명(체신부 차관)?양승택(한국전기통신연구소 TDX연구개발단장)?서정욱(한국전기통신공사 TDX사업단장)등 3인방에 의해 주도됐다. 정책을 총괄하는 오명의 지휘 아래 기술개발과 생산 및 상용현장에서 양승택(연구개발)과 서정욱(생산?상용화)이 야전사령관으로서 제 역할을 다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TDX국산화를 성공시켰다.

전자교환기는 1958년 미국 벨연구소가 축적 프로그램 제어방식(SPC:Stored Program Control)을 개발, 최초로 출현했다. 이 방식은 프로그램을 간단하게 변경, 운용관리와 유지보수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특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초기에는 크로스바 스위치, 리이드 스위치 등 통화로부에 전기기계적인 접점을 사용해 교환하는 반전자 아날로그 방식이 등장했다. AT&T의 No.1A, BTM의 M10CN ESS 등이 그것이다.

그후 반도체 집적회로 및 소자기술의 발달로 통화로부를 전자화하게 돼 전전자(全電子) 디지털 교환기를 실용화하게 됐다. 가장 먼저 선보인 전전자교환기는 1970년 프랑스 Alcatel가 개발한 E10A이며 그 후 에릭슨의 AXE-10, AT&T의 No.4 ESS, No.5 ESS 등이 개발, 보급됐다.

우리나라는 1981년 전전자교환기에 연구개발에 착수, 1986년 TDX 전전자교환기를 세계 10번째로 국내기술에 의해 개발했으며, 이어 1만 가입자 회선 용량의 TDX-1A, 2만가입자 회선 용량의 TDX-1B를 차례로 개발, 상용화했다

TDX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오명이 1981년 체신부 차관으로 부임 하면서부터. 그의 발탁은 체신부 장관 최광수와 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이뤄졌다.

정부는 이 당시 TDX연구개발비로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 24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대규모 공장 하나 짓는 데 50억원이 들어가던 시절로 대규모 국책프로젝트였다. 만성적인 전화 적체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전화 도입 80여 년 만에 통신독립을 결심한 것이다.

이에 대해 기업들은 물론 체신부 직원들조차 대부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오명의 의지는 이같은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강력했다. 그는 시작에 앞서 기술개발을 독려하기 위해 ‘성공만이 살길’이라는 각오로 기술개발을 책임진 전기통신연구소 간부들에게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떤 처벌도 감수한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훗날 ‘TDX 혈서’로 불리는 문건이 바로 이 서약서다. TDX연구개발에 임하는 자세가 얼마나 비장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국산 TDX연구개발을 맡은 전기통신연구소장 최순달은 오명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다. 한국전자통신의 상무 양승택을 TDX개발단장으로 스카웃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명은 삼성측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설득, 양승택을 전기통신연구소로 스카웃해 TDX개발단장을 맡겼다.

최순달이 양승택을 영입하고자 했던 것은 연구개발에 대한 그의 의욕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양승택은 구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최순달을 기차역에서 만나 TDX연구개발에 참여시켜달라고 간청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다. 최순달은 급여 등 근무여건이 훨씬 나은 삼성을 마다하고 ‘연구개발이 좋아’ 연구소로 오겠다는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아 오명에게 스카웃을 요구한 것이다.

양승택은 “기술 개발만이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며 기술진을 독려, 우리와 기술제휴를 맺고 있던 에릭슨의 AXE-10을 모델로 1984년 TDX1의 핵심기술을 성공적으로 개발했다. 이에 체신부는 이 사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TDX핵심기술이란 교환시스템의 설치 및 운영에 필수적인 시스템설계기술, 하드웨어기술, 소프트웨어기술 등을 의미한다. 향후 개발된 TDX교환기들은 TDX1의 핵심기술 즉 원천기술과 논리적 설계개념에 입각해 개발한 것들이다. 서정욱의 참여는 양산 및 상용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한국통신 TDX사업단장으로 자리를 옮겨 TDX기술이 현장에서 꽃피울 수 있도록 실용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통신은 TDX가 개발된 후에도 상용화에 소극적이었다. 우리의 기술이 일천한 시대로 ‘국산’ 제품에 대한 믿음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정욱은 연구개발에 종사해온 사람으로 생각이 달랐다. TDX 양산과 현장 상용화에 사활을 걸고 뛰었다. 생산 및 시험운용현장을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시험과정에서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한밤중이라고 연구원들을 호출했다. 당시 개발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그를 ‘독종’이라고 불렸다. 특히 서정욱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무기체계를 연구개발하며 축적한 경험과 사업관리기법 및 품질보증기술을 무기체계 못지않게 고도의 신뢰성과 성능이 요구되는 TDX의 연구개발사업에 적용했다.

TDX개발사업에는 한국전기통신연구소와 한국전기통신공사 및 금성정보통신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삼성전자 등 4개업체가 공동으로 참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이들 3인방의 피나는 노력으로 TDX는 연구개발에 착수한지 5년여만인 1986년 3월 상용화에 성공했다. TDX는 1만회선급의 TDX1X(시범인증기)와 TDX1(시험생산기)을 거쳐 양산(TDX1A)에 들어가 2만회선급의 TDX1B, 10만회선급의 TDX10 등으로 발전해 왔다. TDX-1의 위력은 대단했다. 상용 서비스 1년 반 만인 1987년 9월 30일 전국 전화 회선은 1,000만 회선을 돌파하며 ‘1가구 1 전화 시대’를 열었다. 또 TDX 개발은 국내 정보기술 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05/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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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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